625 전쟁 한국전쟁 유엔군 16개국 참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그러나 1.4후퇴

우리가 알아야 할 현대사

625 전쟁 한국전쟁 유엔군 16개국 참전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그러나 1.4후퇴

믿음 성공 2023. 6. 19.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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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이 진행되는 중 드라마틱 한 순간은 6월 전쟁 발발에서 10월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한 날까지다. 이때 유엔군들이 참전했고, 이들의 도움으로 국군은 북진할 수 있었다. 북진하는 우리군을 도운 UN군은 한국이 전쟁의 실마리를 풀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전쟁은 남측의 승리로 끝날 가능성도 조금 보였었다.

 

 

 

625의 아픔


 

유엔군 참전 결정과 16개국 

유엔은 북한의 침략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유엔결의안 하에서 유엔 회원국의 군사적 참여가 가능할 수 있는 조치를 하려면 우선 결의문 채택이 필요했다. 우선 북한에게 철수를 촉구했다. 반응이 없자 6월27일 안보리는 결의문 제 83호를 채택했다고 한다. 그 안에는 무력 공격의 격퇴와 그 지역에서의 국제 평화 및 안전의 회복을 위해 한국에 대해 필요한 원조를 할 것을 회원국에 권고 했다. 이 결의문들은 유엔 헌장에 따른 집단 안보를 발동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유엔은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튀르키에(터키),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프랑스, 남아프리카공화국, 벨기에, 룩셈부르크 총 16개국 2,778,905명의 원조군이 들어왔다. 
북한의 지배자들은 이런 원조군이 들어온다 해도 남한 내 남로당이 있어 곧 정치적 지지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엔군 참전에 소홀했고 그래서 이정도의 참전이 가능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상륙작전까지 가능해 졌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

인천상륙작전은 부산 대구에서 밀고 올라가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인명피해가 예상되기 때문에 시행한 무모해 보였던 작전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먹혀서 북진할 수 있었다.
 

1) 미군들도 반대했던 작전

미 합참과 미 해군 측은 인천상륙작전 계획에 대해 반대의 뜻을 밝혔다.
미합참은 적에 의한 가개 격파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낙동강 방어선도 문제라고 생각했다. 힘의 추가 해군쪽으로 쏠릴 경우 아군의 피해가 더 커질 수 있었다. 게다가 미국 최정예 부대 중 하나인 해병대가 무너질 경우 전군의 사기가 떨어질 가능성이 높아 신중한 입장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2) 맥아더의 뚝심이 한번은 통했다.

맥아더는 인천을 통해 빨리 서울로 가고 싶었던 것 같다. 게다가 보급로가 허리에서 끊길 경우 북한군의 손실이 엄청날 수 있기 때문에 미군과 유엔군은 인천을 택했다. 그리고 맥아더의 생각은 적중했다. 북한군은 당황했고 기세를 몰아 미군은 토끼몰이식 방법으로 북진했다.

3) 한국군의 활약

38선을 통과해서 북으로 달려간 한국군은 미군보다 더 큰 성과가 필요했다. 전쟁이 종식될 때 대힌민국군의 활약이 없을 시에는 미국의 결정에 우리 정부가 끌려 다닐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평양을 공격할 때도 백두산을 공격할 때도 국군은 가장 먼저 북진했다.

4) 중국군대의 공격

중공군이라 불렸던 중국 군대가 참전했다. 이들은 이미 1차 2차에 걸친 국공내전으로 전쟁경험이 풍부했다. 2차세대전을 남의 나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미국이나 1950년 전쟁 발발과 동시에 창립된 대한민국 군대들과는 수준 차이가 있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엄청난 소음과 함께 사람의 얼을 빼았는 전술이어서 국군과 미군의 피해가 많았다.

5) 1.4 후퇴
1951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는 다시 서울에서 떠난다. 이곳이 다시 북한군에게 점령 당한다. 중공군보다 미군과 대한민국 군인이 강하지 못했다.

 

 

 


1.4 후퇴 이후 전쟁은 장기전이 되었다.

남측과 북측은 어떻게 해도 어려운 전쟁을 스스로 최대한의 병력을 투입하여 전투를 벌였다. 2차 세계 대전을 치룬지 불과 5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거의 모든 국가에게 625전쟁인 한국전쟁은 너무나 힘든 전쟁이었다. 쉬고 싶어 하는 국민들을 설득하여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독려하는 미국 정부는 점점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많아졌다. 미군도 소련도 자신들의 병력을 더 이상 증깅하고자 하지 않자 남한과 북한의 희생이 엄청나게 늘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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