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발발한 전쟁이다. 여러 설들이 있다. 북한이 전쟁을 계획적으로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다른 설들도 있다. 북한은 북침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설득력은 떨어진다. 하여간 북한의 남침으로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고 한다. 전쟁은 참 힘들께 진행 됐다.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공산군의 남침 625전쟁
한국전쟁은 선전포고 없이 발생했다.
1) 불법적인 전쟁이 발생했다.
1차 세계 대전은 선전포고를 하고 전쟁이 시작됐다. 민간인들이 피했지만, 전 세계가 전쟁중이어서 유럽인들은 어디 숨을 곳 없이 정처 없이 떠돌다 전쟁의 참혹함을 알게 됐다. 2차 세계 대전은 히틀러가 선전포고라기 보다는 예견된 광끼로 공격하면서 전쟁이 퍼졌다. 선전포고가 없었지만, 프랑스 영국 등은 전쟁을 미리 준비해야 했다. 한국전쟁은 좀 달랐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생하기 전부터 대한민국과 조선인민주의인민공화국 간에 여러 국지전이 있었다. 양측의 무기 수준이 어느정도 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 저기서 포탄이 날아가고 전쟁 비슷한 국지전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 많은 국지전 중 좀 쎈 국지전이 발생했고 그래서 전쟁이 화대 됐다고도 한다. 북한의 경우 남한측이 불법 북침했다고 하기도 한다고 한다. 대한민국 육군과의 국지전을 확대해석하는 것 같다.
북침을 할만한 여력이 이승만 정권에게는 없었다.
전쟁 후 북한의 여러 작전 지도가 입수되면서 북한의 남침은 명확히 규명됐다.
2)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었던 미국
전쟁은 사실 벌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먼저다. 시작하면 멈추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라 할 지라도 상대방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전력이 아무리 차이가 나도 버티면 속수무책이다.
한국전쟁이 발생할 것으로 미국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미군은 거의 모든 병력을 후퇴 시킨다. 표면적으로는 애치슨라인을 만들어서 이다.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애치슨은 소련의 남하를 막을 방어선을 제안한다. 일본 필리핀은 포함되고 한국과 대만은 포함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후 호황을 누리던 미국은 어려움이 있었다. 유럽 재건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있었다. 1940년대 대공황을 경험했던 미국은 그냥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정책 비슷한 것을 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런데, 대만 대한민국 등을 돌보면 엄청난 예산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나름 체면을 지키면서 적정한 타협안이 애치슨라인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다.
답답했던 대한민국은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은 전쟁이 발생해도 국지전에서 마무리가 될 것으로 파악했던 것 같다.
그러나 북한 정부는 6월 25일 새벽 4시 남침을 감행 했다.
3) 대한민국 정부 여름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대한민국 육군은 625 당일 병력의 상당 숫자가 이탈해 있었다. 농번기를 맞아 한국군 중 상당수를 농가로 보냈다. 당시 농업국가였던 대한민국의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었던 군대가 모내기철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결정을 누가 내렸는 지 조사하면 나오겠지만, 그 사람이 역적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미뤄 북한과 내통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대한민국 정부도 여름 보다는 겨울에 북에서 처들어올 것으로 봤을 것 같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전염병이 생기고 산지가 많아 보급로 차단의 위험이 많은 여름에 북한이 남침할 것으로는 생각 못했을 것이다.
4) 한국전쟁 발발 3일만에 한강다리를 폭파하는 부실한 의사 결정 라인
한국전쟁이 터지고 3일만에 수도 서울이 함락됐다. 이승만 정부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고취시키기 위해 서울을 대통령이 지키고 있다고 했다. 마음은 그곳에서 끝까지 결사항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남하하는 북한군에게 수도 서울을 내줘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정부가 서울을 비우면서 북한군의 남하하는 라인이 될 수 있는 한강대교는 철거 돼야 했다.
비록 국민들이 희생될 수 밖에 없었지만, 누군가의 결정으로 다리는 폭파 됐다. 그런데, 아직 서울 강북쪽에는 많은 군인들이 남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마 보고 체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서울 강북에서의 적군 지연 작전이 이뤄졌을 것이고, 한강 이남에서 시간을 더 벌어 줬을 수 있으며 동시에 적 병력 손실을 이뤄냈을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많은 희생이 있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많은 희생이 생겼다. 전쟁을 대비하지 못해 전쟁 장비와 비상식량이 없었던 대한민국 국군은 처절한 장비 부족을 느끼면서 맨주먹으로 싸워야만 했다. 한국전쟁 625 전쟁은 이렇게 참혹하게 국군이 깨지면서 전개 됐다. 많은 병력의 손실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전선에 많은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전쟁이 2년차 3년차 진행되는 와중에도 병력은 꾸준히 보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