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 1 : 전쟁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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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한 전쟁 1 : 전쟁의 배경

믿음 성공 2023. 6. 17. 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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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발발 73주년이다. 전쟁기념일로 공휴일로 지정하고 그 날을 기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학생들을 대상으로 북침인지 남침인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북침이라고 대답한 학생들도 있었다고 한다. 진짜 남한이 먼저 공격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답변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쳐들어왔다는 표현이 북침이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그만큼 625에 대한 관심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625를 정리해 보자.

 

 

625 전쟁
625 인사들

 

625는 동족 상잔의 비극이다

625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전쟁고아와 장애인도 엄청나게 발생한 20세기 최대 비극이다. 이날을 기억하여 더 이상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 전쟁이 고통스러웠던 이유는 대부분 전쟁이 한반도에만 일어났다. 그런데 이 전쟁 중 사용된 포탄이 2차 세계대전 때 사용됐던 양 보다 많다는 통계도 있어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625 전쟁사를 보자

1) 2차 세계대전의 끝 일본의 폐망 한반도의 해방

625전쟁은 1950년 새벽 6시경 발생했다. 그런데, 이 전쟁이 발발하기 전 많은 일들이 있었다.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미국은 전쟁의 피로도가 높아지고 있었다. 승기를 잡은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머물고 있던 베를린만 점령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분위기였다. 그런데 일본이 문제였다. 이들은 '가미가제'식으로 자살 폭탄 테러 타입의 반격을 가했다. 일본을 점령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엄청난 인명피해를 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미국은 자국의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른 나라 군대가 필요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중국측에도 도움을 요청했다. 더불어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에도 요청했다. 

소련은 참전하기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다. 히틀러가 모스크바까지 처들어 왔었기 때문에 병력 손실이 컸다. 국방 비용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유럽의 군사를 동아시아까지 보내는 것이 망설여졌다.

미국은 소련이 참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확실한 승기를 잡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실험용으로 개발된 신무기 원자폭탄을 보여주고 싶어 졌다. 그래서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전 세계로 하여금 일본이 아무리 엄청난 힘이 있어도 저항이 어렵다는 것을 전세계에 알렸다. 소련은 어차피 끝날 전쟁이니 이권을 챙기러 가자고 하는 심정으로 동북아시아로 병력을 급파했다.

미국은 양국간의 신뢰를 쌓기 위해서 북위 38도선을 기점으로 북쪽에는 소련이 진군하고 남쪽에는 미군이 진군하는 전력을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이 도쿄에도 떨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천왕이 직접 맥아더장군 앞에서 항복하는 항복 선언을 했다. 

아무런 준비 없이 조선도 미국도 소련도 갑자기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다. 

여담이지만, 이때 김구 선생님은 크게 통곡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이 무너져 버리면 대한미국은 승전국이 될 수 없고, 이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우리 조국이 불쌍하여 통곡하셨던 것이다.

 

2) 엄청난 혼란과 남북한 개별 정부 수립

일본이 폐망하자 한반도는 무정부 상태가 됐다. 미국은 이 혼란을 바로 잡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우선 소련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신탁통치 즉 UN이 한반도에 정부를 구성하여 통치하려 했다. 

김구선생님도 이승만 박사님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제의 압제 하에서도 독립운동하며 때를 기다렸던 독립투사들의 입장에서 신탁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은 용납되지 않았다. 

이때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노동당은 북한의 정권을 장악한다. 그리고 자립 정부를 북한에 세우기 시작했다. 미국을 밀어낼 힘이 없었던 북한 노동당은 우선 정부 수립 전 남한의 눈치를 살폈다.

남한은 신탁통치를 거부하고 UN 주도 하에 총선을 실시한다. 국회의원이 뽑힌 것이다. 이분들이 7월 17일 헌법을 제정 배포하고 1948년 8월 15일 정부를 수립했다.

 

3) 남한은 산업시설이 북한은 쌀이 필요했다.

남한 이승만 정권은 미국 군정의 간섭을 피하기 어려웠다. 반면 김일성 정권도 소련의 간섭을 피하기 어려웠다. 강력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북한은 중공업 산업을 이끌 이들을 위한 식량이 필요했다. 반면 남한은 석탄을 비롯한 자원과 생산 시설이 필요했다. 일본에 물자를 보내기 위해 만들어졌던 한반도의 산업 지형도는 통일 정부가 아니면 운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4) 소련은 남하하고 싶었다. 미국은 신경쓰기 싫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 영토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연합국가였다. 15개 나라의 연합이었는데, 모든 나라가 부동항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소련 서쪽은 세인트 뻬쩨르브르크 당시 이름은 레닌그라드의 경우 겨울에 배를 띄우기 어려웠다. 반면 북한 바로 위에 있는 블라디보스톡은 일년 내내 배를 운영할 수 있었다. 그 항구가 북한쪽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소련의 군사력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배경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은 북한이 남한을 쳐서 적화된 한반도가 필요했다.

미국은 소련과 상황이 좀 달랐다. 정복전쟁을 할 수 없었다. 미국 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자꾸 뭔가 일을 보리는 것이 꺼려졌다. 그래서 남한 쪽에 설치됐던 미국 무기를 다 철수 시켰다.

 

5) 중국 본토가 적화되는 것을 그냥 바라만 본 미국

미국은 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다. 그런데, 자국민의 손실이 너무나 컸다. 젊은이들을 더 이상 희생시킬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중국 본토가 마오쩌뚱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보고 있기 만 했다. 결과론적으로 마오쩌뚱(모택동)이 점령한 공산화된 중국 때문에 미국의 영향력을 동북아시아에 미치기 어려운 상화이 되었다.

 

북한의 남침은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오전 4시에 감행됐다.

한반도를 지키는 미군은 남침을 막기 어려웠다. 아무리 잘 준비된 군대라 해도 어려운데, 이상한 역학적 상황에서 대한민국이 북한의 남침을 막을 방도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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